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리 왕조 (문단 편집) === 쇠퇴기 === [[파일:지리 왕조 튀니지.png]] 하이다란 산 전투에서 지리 왕조는 마킨 앗 다울라[* 파티마 조가 파견한 지휘관. 그는 전리품을 두고 다투던 힐랄 부족을 규합하여 카이로완의 포위를 이끌었다. 또한 지리 왕조의 중추였던 산하자 기병대가 투항해 오자 그 수장을 내륙 가베스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]가 이끄는 친파티마 계열의 베두인 군대에게 대패하였고 이내 알 무이즈는 카이로완에서 포위되었다. 1054년까지 이프리키야의 내륙 지방은 베두인들에게 유린되었고 이로써 반달 족의 침공과 아랍 정복을 견뎌낸 관개 시설이 크게 파괴되었다. 이는 추후 천년간 완전히 복구되지 못하였다. 1057년 수도 카이라완이 함락되었고 알 무이즈는 간신히 항구 도시인 알 마디야로 탈출할 수 있었다. 카이라완이 폐허로 변하며 이후로 지리 왕조는 새로운 수도 알 마디야와 튀니스, 알제 등지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무역으로 간간히 유지될 수 있었다. 내륙 지방에는 베두인들의 세운 공국들이 들어섰다. 1059년엔 함마드 왕조로부터 튀니스 총독으로 임명된 아브드 알 하크가 후라산 왕조를 세우며 독립하였다. 왕국의 엄청난 손실을 경험한 알 무이즈는 1062년 사망하고 아들 타밈이 계승하였다. 악몽과도 같은 1050년대를 보낸 지리 왕조의 영토는 튀니지 동부 일대로 국한되었다. 이프리키야는 한세기 후 무와히드 왕조의 정복시까지 여러 왕조들로 분열되어 있어야 했다. 타밈은 1063년 튀니스 수복을 노렸으나 실패하였고 후라산 왕조를 인정해야 했다. 1087년에는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인 [[피사 공화국]]과 [[제노바 공화국]]의 연합군에 의해 일시적이긴 하지만 수도 마디야를 함락당하였고 엄청난 배상금을 바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. 시칠리아 왕국의 [[루지에로 1세]]에게 연공을 바치는 등 쇠퇴하는 왕국을 살려보려 노력하던 타밈은 40년 이상 재위한 끝에 1102년에 사망하였다. 이후 아들 야흐야가 1116년까지 재위하였고 알리 이븐 야흐야가 계승하였다. 그의 치세에 시칠리아의 [[루지에로 2세]]는 지리 왕조가 연공 납부를 미룬다는 이유로 두차례 튀니지 해안을 공격하기도 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